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 제국 (문단 편집) == 델리 더르바르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1b93492-281b-49fd-b342-206efed5b873_3_tbig.jpg|width=100%]]}}} || || '''{{{#FFF [[1877년|{{{#fff 1877년}}}]] [[빅토리아 여왕|{{{#fff 빅토리아 여왕}}}]]의 델리 더르바르}}}''' || 델리 더르바르(Delhi Durbar)는 직역하면 '[[델리]]의 궁정'이라는 뜻으로,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위에 즉위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델리]]에서 치르는 행사였다. 쉽게 말하면 '''인도 황제 즉위식'''. 영국 국왕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국 국왕으로서의 즉위식으로 치렀고, 델리에서 인도 제국 황제로서의 즉위식을 또 한번 치렀는데 이게 바로 '델리 더르바르'다. [[1877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한 번, [[1903년]]에 [[에드워드 7세]]가 한 번, [[1911년]]에 [[조지 5세]]가 한 번씩 이렇게 총 3번 치러졌는데, 실제로 델리 더르바르에 참석한 영국 국왕은 조지 5세 딱 한 명밖에 없고 니머진 총리가 대리했다. [[https://band.us/page/75250823/post/182|#]] 굳이 델리 더르바르를 치른 것은 영국 국왕의 인도 황제로서의 지위를 공고히하고 인도의 통치권이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국왕에게로 옮겨온 것을 확실히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도 총독 리턴 경은 '인도인들은 작은 호의나 명예의 표시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 황제로 선포하면 인도 신민들이 무굴 제국의 고대 황좌에 그녀의 권위를 두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과거 [[무굴 제국]]이 소유했던 인도 전체를 아우르는 황제라는 타이틀을 빅토리아 여왕에게 덧씌우려 했던 것이다. 1877년 치러진 빅토리아 여왕의 인도 여제 즉위식은 극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1877년 1월 1일부터 약 2주에 걸쳐서 열렸으며, 인도 전역에서 인사온 마하라자, 왕족과 귀족, [[나와브]]들이 참석했다. 공식적으로 84,0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행사에 참여했고 군악대들이 퍼레이드를 벌였다. 델리 더르바르는 세계적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은 전 세계에 이 소식을 떠들었고, 1903년 [[뉴욕]] 코니 아일랜드에 개관한 루나 파크에서는 델리 더르바르를 컨셉으로 구역을 만들어 인도식 퍼레이드를 벌였다. 이 퍼레이드는 하루 5천 명이 넘게 방문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서 곧 폐쇄되었지만, 당시 델리 더르바르의 명성이 단순히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등 세계적으로도 퍼져나갔다는 증거였다. 1903년에는 [[에드워드 7세]]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알렉산드라 왕비]]가 인도 황제 황후로 즉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델리 더르바르가 치러졌다. 2주간 치러진 1903년의 델리 더르바르는 1877년의 더르바르보다도 압도적으로 화려하게 치러졌다. 당대 인도 총독 커존 경은 심혈을 기울여서 행사를 기획했고 황량한 평야를 수많은 텐트들로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인원을 동원했다. 이 행사를 위해 임시로 경전철을 깔았고 자체 우표 발행, 임시 우체국 및 상점 설치, 경찰, 병원, 치안 법원 설치는 물론 심지어 경찰 제복마저도 특별히 디자인할 정도로 신경을 쏟았다. 하지만 커존 경에게는 실망스럽게도, 행사의 주인공 에드워드 7세는 정작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아서 윌리엄 패트릭 앨버트]] 공작을 대신 파견했다. 커존 경은 앨버트 공작을 맞이한 뒤 인도 전역에서 불러모은 마하라자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관람했다. 커존 경은 어금니에 금으로 된 촛대를 꽃은 코끼리를 타고 축제에 참석했다고.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행사였던 만큼 영국 식민정부도 인도인들에게 행사 홍보영화를 제작해 방영하는 등 행사 홍보에 신경을 썼는데, 이게 인도 영화산업의 시작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1903년 델리 더르바르는 극소수 인도 마하라자들과 영국 고위계급들이 참석한 무도회에서 정점을 찍었는데 이때 어찌나 휘황찬란한 옷차림을 하고 왔던지 커존 경의 아내의 공작 드레스는 아직까지도 더비셔에 고이 보관되어 있을 정도다.[* 공작은 인도 황제들의 상징이자 특히 [[무굴 제국]] 황제들의 상징이었다. 커존 부인이 입었던 드레스는 무굴 황제들이 앉던 왕좌 '공작좌'의 디자인을 참조해서 만들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35379-1323770146.jpg|width=100%]]}}} || || '''{{{#FFF 1911년 인도를 방문해 마하라자들의 문안을 받는 조지 5세.}}}''' || 1911년에는 새 국왕 [[조지 5세]]의 인도 황제 즉위를 기념하기 위한 더르바르가 열렸다. 조지 5세는 1911년 11월 11일 [[포츠머스]] 항을 출발해 12월 7일 5만 명의 호위를 받으며 델리에 도착했다. 당시 국왕은 말을 타고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자신들의 새 황제가 인도 전통식 갑옷을 입고 코끼리를 타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도인들은 상당히 실망했다고. 행사 자체는 12월 12일에 열렸다. 고위층들을 위해 1만 석에 달하는 관람석이 세워졌고 5만 명의 델리 시민들이 좌석 뒤에 서서 구경했다. 인도 황제관을 쓴 조지 5세는 이 곳에서 공식적으로 인도 황제에 즉위했고, 이때 인도의 수도를 [[캘커타]]에서 [[델리]]로 공식적으로 이전했다. 왕이 자리를 떠나자 열광하던 군중들이 몰려들어 광장을 꽉 메웠다. 다음날인 12월 13일, 조지 5세는 [[레드 포트]]의 발코니에 머물며 50만 명 이상을 맞이했다. 옛 무굴 제국의 관습을 따라한 것이었다. 영국군 및 인도군 병사들에게 무려 26,800여 개에 달하는 훈장을 내려줬고 개중 100개는 특별히 황금으로 만들어 인도 마하라자들이나 영국군 최고위 장교들에게 하사했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친 조지 5세는 기차를 타고 [[네팔]]로 이동해 [[호랑이]] 사냥을 즐겼다. 이후 다음해 1월 10일에 [[봄베이]]에서 출발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의외로 이 방문은 인도인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에 효과가 있어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인들의 들끓는 불만 여론을 약화시키고 많은 인원들을 차출해 전쟁에 데려가는 데 성공하는 효과를 냈다. 1936년 1월 조지 5세가 사망하자 [[에드워드 8세]]가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델리 더르바르가 치러져야했고 당시 인도 총독이던 린리스고 경 역시 이 계획을 밀어붙일 생각이었으나, [[스탠리 볼드윈]] 총리와 국왕 주치의는 에드워드 8세가 국왕 즉위식 직후에 인도까지 장거리 여행을 할만한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안된다고 판단해서 이를 뜯어말렸다. 결국 에드워드 8세의 델리 더르바르는 1937년 이후로 '연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버린다. 그러나 델리 더르바르 연기가 발표된지 1년도 되지 않은 1937년 8월, 인도의 독립운동에 가속이 붙는다. 1935년 제정된 인도 정부법에 따라 이미 온건한 독립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고, 1937년 지방선거에서 11개 주 중 7개 주를 장악한 [[인도 국민회의]]는 대놓고 인도 독립을 주장했다. 인도 국민회의는 더르바르 행사 보이콧은 물론이요 그딴 행사에 인도인들의 세금이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인도인들의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린리스고 총독은 본국에 '만일 왕이 인도를 방문한다면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전했고 [[자와할랄 네루]] 역시 영국 국왕에게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인도에 말라고 말했다. 인도 현지의 상황이 안좋다는 걸 깨달은 체임벌린 총리는 국왕의 인도 방문을 심각하게 재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8세]]가 제 영토인 인도에 가보고 싶다는 입장을 강력히 피력했기에 이를 만류하는 데에 진땀을 빼야했다. 체임벌린 총리는 1937년 10월 국왕 연설문에서 왕이 직접 인도에 가겠다는 내용을 빼버리는 데에 성공했고, 조금 더 밀어붙여서 1938년 2월에는 왕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안정될때까지 인도 방문을 무기한 연기하겠다'라는 입장 발표를 이끌어내는데도 성공한다. 만약 이후 아무 일도 없었다면 에드워드 8세가 더르바르를 치렀겠지만... 1년 후에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인도 여행은커녕 해외 방문마저도 어려워지며 에드워드 8세의 더르바르는 흐지부지되어버린다. 이후 1947년 인도가 독립하며 델리 더르바르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